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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브롤리 화랑 비트린전 - 한명옥 (1)

‘무서운 속도로 멀어져 가는 저 여자’라는 표현을 어느 소설에선가 읽고 가슴에 담아 둔 적이 있다. 언젠가 한명옥 작가에 대해 말할 기회가 생기면 그와 같은 톤으로 이렇게 소개하리라 생각했었다 :‘저기 그 여자 전체가 있다. 자신의 모든 존재감을 안고’. 그의 작업도 그러하다. 보잘 것 없는 항아리에실이 끝없이 놓였는가 ? 낱낱의 쌀알이 쌓고 쌓여 만리장성이 되었는가 ? 무한한 색원들이 벽 전체에 별들처럼 영롱한가 ? 거기엔 한명옥 전체가 담겨 있다. 바로 그것이 저 가녀린 작품 사이의 빈 공간을어떤 보이지 않은 에너지로 가득 채우는 것일 게다. 팔레 드 도쿄 디렉터였던 올리비에 케플랭은 처음부터 시간이 공간을 구축하는 (littéralement, le temps bâtit l'espace) 한명옥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필립 피게는 본질을 향해 치닫는 한명옥의 작품에서 그 건강함을 (salubrité mentale), 그리고 저명한 비평가 까트린느 프랑블린Catherine FRANCBLIN은 놀라운 투명함의 시각적, 시적 지름길을 (un raccourci visuel et poétique d’une remarquable limpidité) 보았다. 타협하지 못하는 외골수의 작가적 기질이 한명옥을 은둔의 길로 몰아넣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큰 작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유명한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내서도 그가 한 때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큐레이터들과 전시를 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무엇보다도 정직하게 그의 작품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현재 파리 장 브롤리 갤러리 (Galerie Jean Brolly 16, rue de Montmorency 75003 Paris)의 비트린에서(7월 30일까지), 마르세이유 아르카드(Art-cade, Galerie des grands bains douches de la plaine 35 bis rue de la Bibliothèque 13001 Marseille)에서 (6월 18일까지) 한명옥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최근 한인회에서 기획한 수차례의 기메미술관 한국관 컨퍼런스를 통해 여러분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여러번 가졌다. 그렇게 가지게 된 신뢰가 오랫동안 숨겨진 보물처럼 지켜봐 왔던 한명옥 작가와의 대화를 같이 나누려고 결심한 동기이다. 두 주에 걸친 인터뷰 기재를 흔쾌히 승락하신 박언영 편집장님께 감사드린다.


최 : 86년 도불 후 디종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시고 파리로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한: 한국에선 회화를 전공했었지만, 작가라는 소명의식도 없이 방황을 많이 하다가 86년 2월 프랑스에 와서 디종미술학교에 편입을 했지요. 그곳에 가서야 내가 어떤 기질의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되었으니, 그 학교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산실 같은 곳이예요. 한국미술교육이 테크닉 위주라면 이곳 그당시 미술교육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것이 최대 목표 같아 보였어요. 91년 파리에 도착해서는 또다른 문제와 직면했어요. 디종에서는 내 작업방향 설정에 온통 몰두하느라 정작 어떻게 젊은 작가가 미술계에 데뷔하는지 하나도 정보를 갖고있지 않았었고, 생활비도 넉넉치 못해 파리에 작업실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학교시절보다 더 큰 현실적 문제였지요. 그러다 어떻게 어떻게해서 저렴한 월세로 파리변두리에 작업실이 생겼고, 같은 처지의 젊은 작가들과 최대한 많은 전시를 하려했고, 매 전시마다 내 작품은 새로운 누군가의 눈에 띄어, 그가 초대한 또 다른 전시를 하게되었어요. 파리 변두리여서  제대로 알려진 전시는 아니었지만, 95년 에스파스 몽조아에서 한 «잃어버린 시간 Temps perdu»전이 제 첫번째 개인전이었어요.
최 : 선생님께서 프랑스에서 많이 알려지시게 된 계기는1996년 거장과 신인을 함께 소개하던 그 유명한 잡지 «나인티»에 장 르각과 함께 실리면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 몽후즈 살롱전에 출품했던 돌덩이 (pavé)가 미술잡지 나인티의 관심을 끌어 96년 20호에 31페이지에 걸쳐 작품 사진이 실리게 되었어요. 그후 그 잡지를 본 스위스 기 바르치(Guy Bartschi) 갤러리와 만나게되었구요. 이후부터 그 갤러리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전시도 하고, 파리 피악을 비롯 유럽 아트페어 참가도 할 수 있었으니, 나인티가 내게 참 큰 기회를 주었어요. 그걸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요.
최 : 현재 파리 장 브롤리 화랑 비트린에서 전시를 하고 계신데 작은 전시 공간이지만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잘 대변해 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한: 우선 브롤리화랑의 비트린공간은 25제곱미터로 내겐 얼마든지 변화를 시도해볼 수있는 만만한 크기예요. 특히 이번엔 접목시리즈 두 점을 선별했는데, 이만한 공간 사이즈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주 본 벽에 수평 수직으로 접목을 놓았고, 시멘트 바닥에는 빨간실을 담은 구리 재질의
다라를 놓았어요. 그리고 비트린에서 보이는 정면 벽엔 지난 겨울에 했던 수채화뎃생 다섯점을 놓아 서로서로의 기운이 상생되는 그런 공간을 기대했어요.

최 : 대체로 작품 소재들이 실이나 나무 돌멩이, 철봉 등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인데 그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한 : 만약에 내가 페인팅만 하는 사람이라면 내 재료는 붓 또는 연필 펜 물감 종이 캔버스에 한정되어있겠지요. 그랬다면 참 편했을텐데요. 적어도 재료찾기 고생은 조금 덜 할테니까요. 작업테마가 나 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관심반경에서 찾아지는 것처럼, 그것에 필요한 재료 역시 내 몸이 움직이는 행동반경에서 찾아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요? 특별난 이유없이도.. 내 작업은 지극히 일상적이니까요.

최 :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띤 것은 ‘결합’이라는 테마였습니다. 가녀린 듯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 위태하게 서 있는 긴 나무, 그리고 그 언저리에 새 둥지처럼 얹힌 작은 돌멩이. 그 여린 존재들이 함께 흰 무명실로 한 없이 감기어진 장면은 알 수 없는 감동을 자아냈어요. 반대로 그 건너편 벽에 있는 철봉과 나뭇가지는 여리다는 느낌보다는 일 미터 이상의 전체 길이를 챙챙 감고 있는 실의 텐션으로 무한한 에너지의 발산을 느꼈습니다.
한: 접목시리즈는 30년전 프랑스에 도착해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환경에 적응하고자 애썼던 흔적이 담긴 작업입니다. 나무와 돌멩이, 나무가지와 메탈, 서로 이질적인 재료를 가느다란 무명실로 총총 감아, 하나는 벽에 수직으로 약간 비스듬히 세웠고 (Greffe1) , 나머진 수평으로 벽에 고정시켰습니다 (greffe 3). 이질적인 상대지만 서로서로 잘 사귀어서, 또 서로 잘 적응해서 새로운 싹을 내리라 기대하면서 접목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특히 첫번째 접목은 1991년 제작한 뒤 줄곧 제 작업실 구석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왔어요. 두번째 접목은 오래전에 스위스 기 바르치(Guy Bartschi) 갤러리를 통해 팔렸는데, 어느날 불현듯 이것을 다시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2015년에 다시 만들게 되었고( greffe3),그것을 이번 전시에 보입니다. 물론 두번째 것과 조금 다르지만요. 이따금 흔적없이 사라진 작품들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최 : 서로 성격이 많이 다른 소재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아주 «가난한 poor» 소재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의 작품은 60년대 이태리 미술 운동 아르테 포베라를 생각하게도 하는데요… 실제로 선생님의 작품은 실처럼 부드럽고 밝은 소재와 돌이나 철봉처럼 단단하고

어두운소재 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니까요.
한: 미술사의 많은 것에 난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르테 포베라 뿐 아니라, 내가 프랑스에 도착했던 86년이후 성행하던 프랑스 설치미술과 영국 조각, 독일 죠셉 보이스 등등 그리고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된 미니말리즘과 일본의 구타이, 모노하까지 수많은 미술 거장들이 내게 페인팅이 아닌 또다른 미술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에 있을 적엔 페인팅밖에 몰랐던 내게 또다른 미술이란 공간이었고, 난 그들이 시도한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표현의 방법이 다양함을 배웠고, 넘치는 자유속에서 나의 것을 찾기위한 고민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최 : 접목 작품에도 쓰셨지만 선생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하얀 면실입니다. 이번 장 브롤리 화랑 전시의 구리빛 다라에는 빨간 색 실을 쓰셨지만요.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도 2005년인가 FIAC에서 바닥에 놓인 실에 감긴 돌 작품을 봤을 때였어요. 작품에 끌려 무릎을 꿇고 앉아
이름을 봤더니 한국 사람 작품인 것을 보고 놀랐었죠. 실을 쓰시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나요 ?
한: 학교 습작 시절에 나이에 대한 테마를 다루게되었어요. 작은 성냥곽에 탄생부터 각 나이를 오브제로 표현하는 좀 미숙한 작업이었는데, 탄생을 의미하는 오브제를 찾다가 자연스럽게 돌상에 얹어진 실타래가 기억났지요. 그때부터 실은 내 작업 속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놀이감이 된 셈이지요.
최 : 항아리에 실 놓는 작품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것인가요 ?
한: 디종학교 졸업 후 파리로 이전해서 작업실 없이 작은 부엌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항아리에 처음 으로실을 놓기 시작했어요. 전기도 나오지 않는 깡촌에서 자랐던 어린시절, 큰어머니 집에 가면 컴컴한 방에서 삼을 삼고 계셨어요. 무릎에 침을 발라가며 문질러 대면 어느새 실은 길게
이어져서 옆의 광주리에 둥그렇게 쌓여졌지요. 큰어머니 일을 내가 슬쩍 훔친거예요. 몇달 만에 항아리에 실이 꽉 채워졌을 때, 갑자기 디종미술학교 시절 화두가 기억나며 산삼 발견한 사람처럼 심봤다! 를 외치고 싶었어요. 이 작업에선 형태와 의미가 공존할 수 있다고. 난 작업에서 형태를 위한 형태는 흥미가 없었고, 의미를 찾아내는데 참 많은 고심을 했거든요. 용기에 실놓기 작업은 완성된 하나의 형태로 물론 이해됩니다만, 실 한올 한올이 얹어지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관객들은 항아리에 채워진 실의 표면을 보지만, 항아리 밑바닥부터 실을 놓기 시작한 나는 내면을 압니다. 마치 한 형태의 깊은 근원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찾고자했던 의미이고, 가운데 남겨둔 구멍은 관객을 그 깊이로 초대하는 통로입니다.

최 : 이번에 전시된 무제 (2016)에서 빨간색 실이 다라의 둥근 윤곽을 따라 깊이와 넓이를 채우며 소복이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 작품의 결과물보다도 장시간에 걸쳐 그 실을 놓는 행위를 하는 기나긴 과정을 보게 됩니다. 그 반복된 행위가 지난하지 않습니까 ?
한: 실을 놓는 행위는 보기에 따라서 같은 제스춰로 보이겠지만, 결코 같은 것의 재탕이 아니랍니다. 실 한올 한올이 놓일 때마다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니까요. 마치 오늘 내가 어제처럼 똑 같은 시각에 일어나서 똑같은 일과로 하루를 보냈다해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결코 같지 않은 것 처럼요.
최 : 선생님의 데쌩은 나무 나이테의 오르가닉한 결을 연상시키도 하고 간혹 페노네의 작품들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데쌩 작품에서 보이는 이 물결같은 결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어요 ?
한: 올 겨울내내, 환쟁이들처럼 붓과 물감과 종이만 갖고 지냈어요. 색깔을 사용하다가 색의 현란함에서 좀 쉬고자 검정색을 찾았고, 그러다가 나온 것이 바로 이 뎃생입니다. 전에 오랫동안  종이에 볼펜과 펜으로 선긋기를 했었는데, 이젠 형태도  유연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딱딱한 펜보다 붓을 사용하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듯 내 뎃생도 변화를 겪는 중이예요. 물결모양이든 나이테든 잘못 보신건 결코 아니예요. 그건 각자 상상에 맡겨요. 난 다만 소리없는  움직임, 그 어떤 하나의  텃치로 선모양이 움직여질 것 같은... 그런 조용한 움직임을 바랬어요. 형태와 의미 또 색깔로부터 자유롭자, 이게 2016년 한 명옥의 모토예요.
최 : 결국 이 작품들을 통해 이번 파리 전시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으셨습니까 ?
한: 어떤 분이 전시 본 소감을 황송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
조용하고 아름답고,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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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밖의 시간을 찾아서 – 한명옥 작가와의 인터뷰(2)
«마르세이유 아르카드전»
du 5 mai au 18 juin 2016
Art-cade galerie des grands bains douches de la plaine, 35 bis rue de la bibliothèque 13001 Marseille


최 : 지난 주에는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 브롤리 화랑의 비트린 전시를 중심으로 얘기 나눴습니다. 이번 주에는 현재 마르세이유 아르카드 (art-cade)공간에서 보여지는 작품들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한 : 이 전시는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것으로 한국 작가 세명의 각기 다른 작품들을 보이는 그룹전이예요. 전시공간이 3.5m × 19m 긴 복도같은 직사각형이어서, 그 조건에 맞춰진 작품을 선별했어요. 2008년 처음 스위스 기 바르치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부적시리즈 중, 르몽드신문지 115장과 퍼포먼스 그리고 2014년 한국 순성미술관 레지던시 체재할 때 만든 비디오 인터뷰를 ( 우리는 언제 행복합니까? 132분 ) 함께 보이고 있어요.
최 : 파리 전시와는 달리 마르세이유에 전시된 작품들은 긴 벽면 전체에 빨갛고 파랗고 노란 다양한 색원들이 별들처럼 무수히 아롱지고 있는데요,이런 작품을 만드신 어떤 계기라도 있습니까 ?
한 : 2004년 팔레스타인과 갈등으로 긴장이 상당할 때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전시하러 다녀왔는데, 그때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안전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2003년 뉴욕 사태이후 그당시 세상은 정말 지옥 같았잖아요. 파리 한국 도서관에 가서 그냥 막연히 어떤 책을 뒤적이다가 빛바랜 작은 사진이 눈에 띄었어요. 색 방울 너댓개 늘어뜨린 사진이었는데, 읽어보니 패총부적, 예전 우리선조들은 어린아이들 방에 그런 색방울을 매달았고, 음양중 양의 기운을 가진 색의 에너지로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거예요. 아, 이거다. 그래서 방울종에 색실을 총총 감아 천정에서 약 1200여개 색방울을 이부자리 위로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을 만들었고(porte-bonheur 2008), 그리고 세상의 안전을 위해서는 전쟁 재해 테러 사고 소식들로 가득한 르몽드신문지 종이에 아크릴릭 물감으로 여러색깔의 동그라미를 붓으로 그렸습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안전한 세상 르몽드, 그작품이 현재 마르세이유 아르카드 (art-cade)공간에서 보여지고 있어요.
최 : 지난 번 시간의 모티브로 한국 아이의 돌상에서 실을 찾으셨듯이 이번에도 한국의 색방울에서 아이디어를 찾으셨군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후 외국에 나와서 근 30년간 작업하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속에서의 한국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 : 이 질문은 디종 미술학교 시절 오를랑Orlan 교수님의 지적을 떠올리게하네요. 86년 가을에 디종미술학교 3학년에 편입되어 치룬 첫번째 시험에 페인팅을 보였는데, 글쎄.. 빵점을 받았어요. 한국 떠날 때 특출난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국에서 대학원 회화과 석사과정까지 이수한 사람에게 빵점이라니, 기가 막혀 자존감이 단숨에 무너졌어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생전 처음 만든 조각을 두번째 시험에 보였더니, 이번엔 오를랑 교수님이 대뜸 그분 특유의 비아냥섞인 질문을 했어요. 너는 한국문화 수출하기 위해 프랑스에 왔냐? 학교 쫓겨나는걸 모면하기 위해 급조되었던 작품은, 한국전통 문살에 한지를 붙여 전구를 켜서 컴컴한 공간에 놓은 것이었습니다. 겹바른 한지를 통해 여과된 불빛이 꽤 한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자랑하고자
하던 것이었어요. 그 질문을 듣던 순간은 어떤 답도 못하고, 또다시 빵점인가.. 절망의 눈물만 쏟아냈어요. 다행히 빵점으로 시작했던 디종 미술학교 생활을 90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것으로 끝냈지만 그 질문은 그 이후부터 두고두고 비수로 꽂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숙고를 하게 했어요.
최 : 최근에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 한 프랑스 철학 교사가 선생님 작품 속에서 ‘한국의 혼을 봤다. 그런데도 그것이 프랑스인인 나를 지극히 감동시켰다’라고 쓴 것을 읽었습니다.
한 : 삼십년 지난 지금 내겐, 한국성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화두가 아닙니다. 나는 내게 충실하면 될 뿐, 그 문제는 내 작업을 보는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한 개인이 만든 작품에는 의도하지 않아도 고유의 어떤 것이, 예를 들면 작가의 성장배경이나 작가가 경험한 어떤 것들이 스며있기 마련입니다. 내 작업속에서 누군가가 한국성을 찾아낸다면 반가울테고, 그렇지않고 내가 전혀 알지못했던 다른 어떤 것을 찾아낸다면 그 또한 나는 기뻐할 겁니다.내 작품 앞에 선 사람은 그의 고유의 경험으로 또 그의 정신적 지적 문화적 수준으로 내 작품을 봅니다. 어쩌면 그 둘간의 소통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최 : 장 브롤리 전시 같은 경우는 다라 속의 빨간색 실 말고는 그다지 색이 눈에 띄지 않는소재로 작품을 하셨고 공간도 많이 비워두셨는데 마르세이유 전시는 한 벽면이 다양한 색의 원형 모티브로 가득차 있는 것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선명한 색방울이 달린 우산 작품도 그렇구요. 파리의 절제된 공간과
마르세이유의 발랄한 색의 공간은 다른 두 세계인가요?
한 : 물론 한 세계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작가가 만든 거니까 한 세계가 되는거고, 한 작가가 만들었어도 서로 의도하는 바가 다르니까 독립된 두 세계가 될 수도 있겠지요. 무색톤의 내 작업들에 익숙해진 이들은 아마 이 원색들의 등장에 난감해 할지도 모르겠어요. 부적의
힘이라도 불러모아 이 미친 세상을 좀 진정시키고 싶단 열망이 너무 크다보니, 미안해도 어쩌겠어요.
최 :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일관성이 있는데도 양식의 제한이 없이 다양해서 자유롭습니다. 데쌩, 설치, 조각, 영상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쟝르의 경계를 편하게 넘으시니까요.
한 : 난 두문불출한 채 실놓기처럼 한가지만 계속하고싶은 마음과 ( 곧 그건 익숙한 어느 하나에 쉽게 안주하고픈 마음일테지요),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재료를 경험하고픈 일종의 모험을 찾는 마음이 내 안에 늘 공존해요. 전에는 설치와 조각 또는 평면작업의 경계선이 각기 분명해서 각 쟝르에 몰두되는
시기가 분명히 달랐고 그에 따른 마음가짐 또한 달랐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쟝르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어요. 한가지 주제를 파고들다보면 자연스럽게 표현방법을 조금 달리한 아이디어와 욕구가 생기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번전시에 보이고있는 부적시리즈 예요. 맨처음 시작된 입체 색방울
설치공간이 신문지에색칠한 평면작업으로 또 실제로 내 몸을 사용한 퍼포먼스로 자연스럽게 진전되었어요. 그리고 이번전시에 처음 보여지는 비디오작업도 어떻게 보면 제작연대나 동기가 부적 시리즈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해도,부적을 써서라도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고픈 보통사람들이 찾는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란 주제를 다룬 인터뷰 내용이 부적을 보완하는 또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싶었어요. 이와같은 맥락으로 이번전시에 함께 보여지게 된거구요. 이제는 표현방식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싶어요. 하지만, 모험이 끝나면 난 집에 돌아가듯 항아리 앞으로 (실놓기)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답니다.
최 : 이번에 전시된 가장자리에 다양한 색방울들이 길게 늘어뜨려진 하얀 우산은 조각이 아니라 퍼포먼스의 결과물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퍼포먼스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
한 : 미술의 여러 쟝르 중, 퍼포먼스는 나와는 상관 없는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남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헌데, 2004년 부터 부적 아이디어에 몰두하다보니, 전쟁터에서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공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사방 70cm의 두꺼운 종이 판자에 색 방울을 매달아서, 그걸 내 머리 위에 쓰면 색방울들에 뒤 덮인 내 한 몸은 색깔의 힘으로 안전하겠다 싶었지요. 그렇게 만든 것에 0.49제곱미터의 안전지대란 제목을 부제로 달았어요. 이건 르몽드 신문이 놓여진 실내공간용이었고, 길거리에선 이미 한사람 용으로 만들어진 우산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겠다ㅡ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랐지요. 때마침, 2006년에 프랑스 남쪽 세트Sète 에서
퍼포먼스 비엔날레가 있어 생전처음으로 이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2008년 스위스 기 바르치 갤러리와 2009년 비트리 아트센터에서 부적 시리즈 작업 보일 때마다 곁들여 했어요. 이번 마르세이유 아르카드 공간에서는 네번째로 0.49제곱미터 안전지대 사각판자를 머리에 쓰고 약 15분간 천천히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독립적인 퍼포먼스 고유의 양식이라기보다 부적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한 퍼즐조각처럼 그 일부로 보는게 맞습니다.
최 : 선생님의 작품에 그토록 화두로 자리잡은 시간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는데요. 선생님께 시간은 무엇입니까?  자주 쓰시는 ‘잃어버린 시간Temps Perdu’ 이라는 표현에서 잃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한 : Temps perdu는 96년 제느빌리에 시립 갤러리와 파리 클로드 사뮤엘 갤러리에서 한달 간격으로 종이 뎃생과 실작업을 보인 두번의 개인전에 붙인 전시제목이었습니다. 내게 있어 잃어버린 (Perdu) 것은 얻은(gagnant)것의 역설적 표현이예요. 한명옥의 시간은 뭐냐? 난 물리학자도 또 철학자도 아니라서 논리적인 답변은 못해요. 실을 놓으면서 난 무궁무진 많은 생각을 해요.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또 어느사이엔 현재로, 종횡무진하지요. 헌데 그러다보면 문득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순간이 있어요. 마치 그건 시간 밖에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 상태를 내가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라고 흔히 우리는 말하죠. 강물처럼 흘러가면 없어져야 하는거잖아요. 그렇다면 인생은 얼마나 허망한걸까요? 내 항아리에 담겨진 실은 흘러가버린 모든 것, 사라져버린 모든 것, 그리고 아직 다가오지않은 모든것까지 불러모은 집합체라면 말이 될까요?
최 : 2001년 스위스 쿤스탈레 베른에서 실을 바닥에다 바로 설치하신 작품을 하셨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품을 애써 설치하시고 마지막엔 다 태워 한 줌의 재로 매달아두시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2000년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식빵에 빨간 실크실로 수를 놓고 스피랄 모양으로 설치하신 작품같은
경우도 하루 하루 벌레가 생기고 썪어들어갔지요. 작품들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오늘날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혀 비경제적인 생산 방식이 아닌가요 ?
한: 실로 바닥에다 바로 하는 설치 작업을 우블리에뜨 (oubliette)란 제목을 쓰고 있는데, 이 작업은 전시장에 미리 도착해서 (전시장 규모에 따라 설치기간은 1주일 내지 2주일 정도 소요 ) 오프닝 직전까지 일을 해야하는 피 말리는 작업이예요. 어떻게 실을 놓을지 사전 계획없이 하는 짓이라 내내 고도의 집중을 해야하거든요. 그 일은 전시기간이 끝나면 누군가가 실을 전부 걷어내어 소각해요. 난 태우고 남은 재 일부를 받아 비닐봉투에 담아 작업실 천정에 매달아 보관하죠. 그토록 심각하게 몰두했던 일이 재로 남아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거리는걸 쳐다보면서 인생이 저런 거구나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식빵은 육체를 위한 아이디어였어요. 아침식사로 입에 들어간 빵이 위를 거쳐 장으로 혈관으로 여행하는걸 상상하며 수를 놓아 바닥에 설치했는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말라 비틀리고 벌레가 생기고 결국 전시후 소각됐죠. 꼭 사람 몸이 늙으면 수축되고 죽는 것처럼요. 그래요, 이런 작업들은 제작
시간도 오래걸리고 보관도 할 수 없어 정말 비지니스에는 효율적이지 못해요. 그렇다해도 난 이런 일들에 끌리고, 마음이 한번 끌린 이상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소각되어 내 눈에는 안보이지만, 기억속에 남아있으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죠.
최 : 결국 작품을 한다는 것은 선생님의 삶에서 무엇입니까 ?
한 : 하루를 보내기위한, 가장 적당한 소일거리 ? 나는 매일 매일 뭔가에 깊게 몰두해야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삶이 너무 헐겁고 멋이 없잖아요?

                                                                                                                                               파리 한인신문 파리지성, 2016                                                                      

                                                                                                                                               최옥경/ 라로셸 대학 및 이날코 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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